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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마음PT] 장마철 저녁, 불안의 얼굴을 보다

  • 김희범 기자
  • 입력 2026.07.1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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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 저녁이었다.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방 안에는 하루가 끝난 뒤 정적이 있었다. 그런 시간에 마음은 자주 빈틈을 찾는다.

낮에는 바쁘다.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고, 전화를 하고, 해야 할 일을 처리한다. 몸이 움직일 때 마음은 비교적 조용하다. 그런데 저녁이 오고, 방 안이 조용해지면 어디선가 익숙한 감각이 슬며시 올라온다.

불안은 매번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처음에는 늘 어떤 사건처럼 보인다.

며칠 전 쓴 글이 마음에 걸린다. 어떤 모임에서 내가 한 말이 떠오른다. 돈 문제, 행정 문제, 사람 사이의 작은 관계가 갑자기 크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표정도 떠오른다. 그 사람이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불안은 참 능숙하다. 늘 새 옷을 갈아입고 찾아온다.

오늘은 글의 얼굴을 하고 오고, 내일은 돈 문제의 얼굴을 하고 온다. 어떤 날은 사람의 표정으로 오고, 어떤 날은 조직의 냉기처럼 온다. 또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가슴께에 작은 그림자처럼 내려앉는다.

 예전의 나는 불안을 ‘문제’로 믿었다

예전에는 그 얼굴들을 다 믿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뭘 잘못했나. 어떻게 해명해야 하나.

생각은 생각을 낳았다. 하나의 걱정이 열 개의 장면을 만들고, 열 개의 장면이 다시 백 개의 해석을 만들었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음속에서는 이미 여러 번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반추, 또는 ‘루미네이션(rumination)’이라고 부른다. 같은 생각을 되씹고 또 되씹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생각 같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해결이 아니라 소모가 된다.

이제는 “또 오래된 패턴이 올라왔구나” 하고 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 이게 또 나왔구나.”

큰 깨달음도 아니고, 대단한 결심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에서 오래된 감각 하나가 다시 올라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번에는 평판 불안이구나. 이번에는 관계 불안이구나. 이번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구나. 이번에는 오래된 자기불신이구나.

이름을 붙이자 조금 거리가 생겼다.

“나는 불안하다”가 아니라 “불안이 올라왔다”가 되었다. “나는 망했다”가 아니라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되었다.

생각과 나 사이에 작은 틈이 생긴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태도를 ‘인지적 탈융합(cognitive defusion)’이라고도 한다.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곧 나 자신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일이다.

머리에서 몸으로 내려온다

 그다음에는 몸으로 내려온다.

호흡을 본다. 가슴을 느낀다. 아랫배를 느낀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은 감각을 느낀다.

머리 위에서 맴도는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주의를 몸의 감각으로 내리는 것이다. 그러면 불안의 힘이 조금씩 빠지고, 나는 다시 ‘지금 여기’로 돌아온다.

불안은 때로는 조심하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러나 늘 정확한 안내자는 아니다. 낡은 경보장치처럼, 실제 위험이 아닌데도 크게 울릴 때가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불안을 이기려 드는 것이 아니다. 그 소리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불안이 와도 끌려가지 않는 사람

불안이 오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와도 끌려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불안에 끌려가지 않을 때 나는 그 에너지를 훨씬 생산적인데 쓸 수 있다. 글을 쓰고,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사람을 차분히 대하고, 나 자신을 함부로 낮추지 않는 데 쓸 수 있다.

불안은 없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그림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성숙은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가 있어도, 빛이 있는 쪽으로 다시 걸어가는 것이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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